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비 무어 (문단 편집) === 유년기 === 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1941년 4월 12일, 에식스 주 바킹의 어프니 병원에서 로버트 프레데릭 무어가 태어났다. 당시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무어의 부모는 공습을 피하기 위해 폭격 대상인 공업 지역에 위치한 집에서 벗어나 강 위의 발전소 근처로 대피해야 했다.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느라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다행히 가족이 모두 생존했다. 무어 가족은 바킹에 있는 웨이벌리 가든 43번지에 살았고 바비는 웨스트버리 초등학교에 다녔다. 무어의 부모님은 바킹을 응원했는데, 가족 전부가 바킹의 홈경기와 원정 경기를 챙겨 보러 다닐 정도로 열성팬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무어는 자연스럽게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무어는 길거리에서 틈 날 때마다 축구를 하던, 당시의 여느 동년배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52BobbyCrispshield.jpg|width=100%]]}}} || || '''{{{#f8d742 1952년, 바킹 팀과 함께 크리스프 실드[* [[http://bdsfa.bdcs.org.uk/crisp-shield-201718/|크리스프 실드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세요.]]] 우승을 차지한 무어}}}''' || 위 사진에서 방패 모양 트로피를 들고 있는 선수가 11세 시절의 무어이다. 이때도 주장이었다고 하니, 유소년 시기부터 특출난 리더십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무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이튼에 있는 톰 후드 기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무어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첫 두 달은 적응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나는 우리 지역에서 온 유일한 소년이었다. 아침 7시, 집에서 바킹 역으로 가는 버스를 혼자 탔고, 완스테드로 가는 기차에 탄 뒤, 레이튼으로 가는 트롤리 버스를 탔다. 그리고 학교까지 오랫동안 걸어서 가야 했다. 나는 날마다 아팠다. 나는 멀미를 이유로 바킹에 있는 의사에게 가서 편입학 자격증을 따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어는 학교를 계속 다니기로 결정했다. 톰 후드 기술 고등학교에서 무어를 가르쳤던 교사 중 한 사람인 조안 라이트는 나중에 무어를 이렇게 평했다. > "그는 학교에서 반장을 맡았다... 매우 인기가 많은 소년이었다. 그곳은 기술과 상업을 주로 가르치는 학교였고, 바비는 거의 6개의 'O' 레벨을 한 번에 통과했다. 뛰어난 학생이었다. 나는 '학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축구선수 지망생'을 만날 때마다 바비 무어를 예로 들며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무어는 톰 후드 기술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레이튼 구 13세 이하 팀에서 뛰었다. 무어는 평범한 선수였다. 무어의 동년배 중에서도 에식스의 15세 이상 청소년 팀에 들어간 선수들이 있었다. 무어는 그들을 우러러보며 자신의 실력이 하루 빨리 늘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어는 나중에 에식스 15세 이상 청소년 팀에 선발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에식스 팀이 무어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임시 센터 포워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어는 이른바 '땜빵'용 선수 취급을 받았다. 선수들 대부분은 무어를 애송이 취급했고, 무어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무어에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 '''"내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자질은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https://spartacus-educational.com/WHmooreB2.htm|#]] 15세가 되던 1956년, 무어는 어느 날 웨스트햄 유소년 팀에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웨스트햄 1군 팀 감독인 테드 펜튼으로부터 젊은 선수들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주장이자 '빅 맬'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 선수 말콤 앨리슨이 선수들의 플레이를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와 있었다. >'''"펜튼 감독은 남학생들을 데리고 야간 훈련을 진행할 때마다 나에게 3파운드를 추가로 주곤 했다. 그래서 자주 학생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프로 선수가 될 만한 재능 있는 선수를 찾는 데에 약간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과 함께한 2주 간의 훈련 기간이 끝나고, 테드 펜튼 감독이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먼저 펜튼 감독은 잉글랜드 스쿨보이스와의 경기에서 혼자 9골을 집어넣은 조지 펜이라는 공격수를 영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조지 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는 마치 축구에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서 헌신적인 면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바비 무어가 엄청난 대선수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경청할 줄 아는 선수였다. 당신도 만약 그때의 바비를 봤다면, 그가 완벽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말콤 앨리슨 테드 펜튼 감독은 말콤 앨리슨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평범한 축구 꿈나무 중 한 명이었던 무어를 팀에 입단시켰다. 그 무렵, 무어는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런던 스쿨보이즈 소속으로 글래스고 청소년 팀과 경기를 진행했다. 이 경기를 보러 온 유명 축구인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풀럼 FC|풀럼]]의 감독 [[론 그린우드]]였다. 그린우드 역시 무어의 플레이를 보고 말콤 앨리슨과 같은 생각을 했다. 론 그린우드는 무어가 1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https://spartacus-educational.com/WHmooreB2.htm|#]]. 그린우드는 1955-56 시즌을 마지막으로 풀럼 감독직을 접고 1957년에 잉글랜드 유소년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앉게 되었는데, 곧장 무어를 유소년 국가대표팀에 선발해 주장으로 삼았다. 둘의 관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어는 1956년 8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무어는 학교 과정을 끝마치고 나서야 웨스트햄과 정식 계약을 맺었다. 날짜는 1957년 7월 19일이었다. 무어는 웨스트햄 유소년 팀에서 본격적으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기 시작했다. 무어는 자신을 웨스트햄에서 뛸 수 있게 해 준 은인인 말콤 앨리슨을 경기장 안팎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버스에 타기만 하면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질문을 퍼부었다. 언젠가는 바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앨리슨 씨,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공을 잡기 전에, 공을 잡은 후 어떤 일을 할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게 가장 중요해."''' >---- >말콤 앨리슨 무어는 앨리슨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앨리슨도 무어를 매우 아꼈다. 연습 경기가 끝나면, 둘은 종종 단둘이 카페에 가서 소금통과 후추통을 선수 삼고 식탁을 전술 판 삼아서 축구 전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또한, 말콤 앨리슨은 발이 느린 무어에게 '가능하면 깊은 위치에서 뛰어라'라는 조언도 해 주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eservemoore.jpg|width=100%]]}}} || || '''{{{#f8d742 2군 팀 소속의 무어}}}''' || 웨스트햄의 유소년팀에서, 몇몇 팀 동료들은 그가 빠른 센터 포워드나 공중에서 강한 선수들과 대면했을 때 굉장히 조바심을 냈다. 그들은 피지컬적으로 훌륭하지 않은 무어가 그 위치에서 고립되는 것을 걱정했다. 무어는 스피드가 느렸고 공중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일리 미러에서 무어의 경력을 취재한 켄 존스는 "바비는 헤딩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깔끔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무어는 지저분한 플레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무어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훈련 태도와 성실함, 그리고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프 허스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 웨스트햄에서 훈련을 시작했을 때 바킹의 금발 청년과 함께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복근 강화를 위한 운동을 할 때, 우리는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 다리를 공중에 들어올려 그대로 있는 훈련을 주로 했다. 직접 해 보면 이 훈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을 하는 50여 명의 선수들 중 마지막으로 다리를 내리는 선수는 바비 무어였다. 언제나."''' >---- >'''"우리는 연습 경기를 자주 했는데, 어느 날 그(말콤 앨리슨)가 우리에게 일단 멈추라고 말한 뒤, "눈을 감아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선수들에게 선수 개개인이 현재 그라운드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무어는 이 특별 게임에서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어는 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레프트윙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고, 라이트백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고, 센터 하프가 그로부터 두 야드 뒤에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조 블록스가 자신의 10야드 앞선 위치에 있는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 >[[제프 허스트]] 유소년 시절의 무어는 여러 포지션을 옮겨 다녔다. 그린우드는 잉글랜드 유소년 팀 코치로 일할 적에, 무어를 전통적인 센터 하프로 보았다. 잉글랜드에서 하프백이란 파괴자를 의미했다. 축구 저널리스트 '존 모이니한'이 쓴 '축구 신드롬'이라는 책에 '그 포지션의 유일한 임무는 '사기꾼을 감시하는 카지노 매니저처럼 센터 포워드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써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프백은 창조적인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경기장에서 가장 덜 까다로운 포지션으로 인식되었다. 지능적인 선수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키 크고 투박한 선수들의 포지션이었다. 세련된 스타일을 가진 무어는 하프백 포지션에서 아주 특이한 유형의 선수로 인식되었다. 무어 스스로가 웨스트햄 유소년 팀에서의 기억 중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경기는 1957년에 있었던 첼시 유소년 팀과의 경기이다. 무어는 뛰어난 드리블러인 배리 브리지스를 성실하게 따라다니며 마킹했다. 경기는 0-0 스코어로 종료되었다. 무어는 이 경기에서 자신이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했고, 경기 종료 후 말콤 앨리슨이 자신을 칭찬해 줄 것으로 예상했다. 무어는 이 날만큼 수비를 잘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말콤 앨리슨은 굉장히 화가 난 상태로 라커룸에 들어와 무어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경기한다면, 다시는 너와 대화하지 않을 거야. 넌 오늘 그저 브리지스를 따라 경기장을 돌아다녔을 뿐이라고! 넌 우리 골키퍼가 공을 잡았을 때는 근처로 다가가서 공을 받으며 그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플레이를 했어. 그렇지? 우리 레프트백이 공을 잡으면 네가 뒤쪽으로 빠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레프트백이 다시 너에게 패스를 해 줄 수 있었고, 너는 중앙 공격수에게 공을 띄워 보낼 수 있었어. 그렇지? 난 너에게서 그런 플레이를 보고 싶어.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을 거야."''' >---- >말콤 앨리슨 앨리슨의 분노는 무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어는 그 후로 다시는 맹목적인 대인 마킹을 하지 않았다. 무어는 앨리슨이 말한, 그리고 자신이 곧잘 했던 플레이를 자신의 스타일로 고정하기로 결심했다. 골키퍼로부터 공을 받고, 레프트백에게 패스를 받아 중앙 공격수에게 길게 패스하는 플레이가 그것이었다. 이런 플레이는 무어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무어는 축구선수 생활을 끝마칠 때까지 이 스타일을 고수했다. 1957년 9월 16일, 말콤 앨리슨은 셰필드와의 경기 후 어떤 병에 걸렸다. 무어 역시 앨리슨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무어는 경기장 스태프 임무를 수행했고, 당일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무어는 업튼 파크 스탠드에 혼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말콤 앨리슨을 보았지만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다. 말콤 앨리슨은 무어와 단짝 친구처럼 함께하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무어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를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그에게 다가가 "왜 그래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라고 물어볼 만큼 내가 그를 잘 알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말콤 앨리슨이 걸린 병은 '''[[결핵]]'''이었다. 앨리슨은 당장 [[폐]] 수술을 받았지만, 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말콤 앨리슨이 더 이상 웨스트햄을 위해 뛸 수 없게 된 것은 웨스트햄 선수들을 자극했다. 웨스트햄 선수들은 절망에 빠진 채 방출 통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빅 맬을 위해 남은 시즌 동안 더 열심히 뛰었다. 결국 웨스트햄은 1957-58 시즌 잉글랜드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부 리그 진출의 꿈을 이뤄냈다. 무어는 다음 시즌인 1958-59 시즌, 1군 팀에 콜업된다. 무어는 앨리슨의 등번호였던 '''6번'''을 자신의 등번호로 선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